법정 진술 나서는 성범죄 피해자들…일상 회복 위한 일보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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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12-24 15:36 조회23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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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진술 나서는 성범죄 피해자들…일상 회복 위한 일보 전진
수사만으론 알 수 없는 고통 전해… 형량에 유의미한 영향
재판 증거·진술 열람 등 권한 보장 목소리
“가해자의 동료들 사이에 제 이름이 오르내리고 지인을 통해 연락이 옵니다. 너무 힘들고 무섭습니다. 최대 형량을 선고해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재판장님.”
성범죄 사건 형사 재판이 진행되던 지난 9월 수원지법의 한 법정. 검사와 피고인 공방이 오가던 중 한 여성이 법정 발언대에 섰다. 성범죄 피해자 A씨였다. A씨는 범행을 당한 후 일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등 수사·재판 기록으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직접 법관 앞에서 말했다. A씨 호소 이후 재판부는 선고기일을 열고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선고 직후 A씨와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재판장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성범죄 재판에 피해자가 있지만 그간 형사 법정은 검사와 피고인 간 공방 위주로 진행됐다. 자신의 피해를 공개적으로 말하기 꺼리는 성범죄 피해자 특성상 A씨처럼 공개 재판에서 직접 진술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형사소송법 294조의2에는 피해자 재판절차 진술권이 규정돼 있다. 2015년에는 증인신문 절차에 의하지 않은 자유로운 의견 진술을 허용하는 형사소송규칙 제134조의10이 마련됐다. 이 같은 규정을 통해 범죄사실을 되짚어 진술하는 증인신문 방식이 아닌 범죄 피해가 삶에 미친 영향과 심경을 법정에서 진술하는 게 가능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법정에 서는 것 자체를 공포로 여기고, 이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 자체를 잘 모르는 성범죄 피해자가 많다. 피해자들은 법정에서 피고인과 대면해 ‘먼저 꼬리친 게 아니냐’는 식의 추궁을 받는 일을 두려워한다. 수사 과정에서 피해 사실을 진술하며 느꼈던 부담감에 입을 닫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만약 첫 기일에서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인정할 경우 통상적으로 재판부는 두 번째 기일에서 형량을 정해 선고하고 재판을 종결한다. 피해자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심경을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소외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수원지검은 지난 8월부터 모든 성범죄 사건 피해자에게 재판에 출석해 자유롭게 진술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A씨도 이 같은 안내를 받고 재판에 나가 진술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수원지검 검사들은 성범죄 사건이 기소되면 곧바로 피해자와 국선 변호인에게 연락을 취한다. 수사 과정에서 이미 진술한 범죄사실이 아닌, 피해자가 느낀 삶의 변화와 감정에 초점을 맞춰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수원지검은 안내문을 통해 ‘피해자의 삶과 감정에 초점을 둔 진술’ ‘하고 싶은 말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피해 치유’를 강조한다. 피해자 본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사건 후 어떻게 일상을 찾아가고 있는지 설명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특히 범죄 유무죄에 관해 진술하지 않는 한 피고인을 간섭하거나 반대신문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안내해 피해자들을 안심시킨다. 원하면 법정 내 가림막 설치, 피고인 퇴정, 비공개 재판도 법원에 요청할 수 있다.
검사들의 안내를 받고 용기를 내는 성범죄 피해자들이 점차 늘고 있다. 안내 제도 시행 전인 올해 1~7월에는 재판절차 진술권을 이용하는 성범죄 피해자가 4명 정도에 그쳤다. 제도 시행 후인 8~10월에는 23명으로 6배가량 늘었다. 피해자들은 수사 기록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자신의 고통을 법정에서 얘기하고 있다.
한 피해자는 최근 법정에서 “범행을 겪은 장소를 우연히 지나가다 가해자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보고 너무 놀라 주저앉았다”고 말해 공판 검사들이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검찰에선 성범죄 피해자의 적극적 의견 진술이 형량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평가도 나온다. 최근 피해자 진술이 이뤄진 23건 중 재판이 마무리된 5건에서 모두 피고인에게 유죄가 선고됐고, 3건에서 실형이 선고됐다.
모든 성범죄 피해자에게 진술권을 직접 안내하는 정책은 수원지검에서 처음 시행됐다. 수원지검은 연말까지 운용 현황을 취합하고 효과 등을 분석해 대검찰청에 보고할 계획이다.
수원지검이 정책을 시행한 배경에는 2015년 스탠퍼드대학교 성폭행 사건 피해자 샤넬 밀러의 책 ‘디어 마이 네임’이 영향을 미쳤다. 밀러는 당시 ‘에밀리 도’라는 가명을 써 재판에 임했는데 가해자는 고작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밀러가 재판에서 낭독했던 피해자 의견 진술서가 공개돼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밀러는 책을 통해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비판하고 연대와 치유를 강조했다.
김유철 지검장은 수원지검 공판부 검사들에게 “우리 수사나 재판 과정이 성범죄 피해자를 가혹하게 다루는 측면이 있다. 그들의 입장을 최대한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책을 권했다. 책을 읽은 검사들은 ‘성범죄 피해자들이 재판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진술권을 적극적으로 안내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한다. 김은경 수원지검 공판부장검사는 “법관이 기록만으로 피해자 진술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생생히 들을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한 피해자는 변호인을 통해 ‘법정에서 내 의견을 말할 수 있게 해줘 감사하다’는 편지를 검사실로 보내기도 했다.
성범죄 피해자 권리 보장에 긍정적 변화가 이뤄지고 있지만 진술권을 제대로 보장하려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소속 안지희 변호사는 “성범죄 피해자가 발언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도록 법정 출석 시 피고인과 분리 조치하는 등 강화된 규정이 필요하다”며 “재판 증거와 진술에 대한 피해자의 열람·등사 권한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환 기자 jae@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33287689&code=11131900&cp=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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